소프트웨어업체 A사는 한 은행과 자체 개발한 보안 기술을 납품하는 계약을 추진하다가 자진 포기했다. 이 은행이 업무 제휴에 앞서 자사가 진행하는 ‘핀테크 공모전’에 참가해야 계약을 하겠다는 조건을 걸어서다. A사에 따르면, 은행 측은 “공모전에서 수상하면 ‘그림’이 더 잘 나오지 않느냐”면서 “그래야 정부도 좋아하고, 언론 홍보에도 유리하다”고 말했다.
A사는 은행측 제안을 거절했다. 해당 은행이 주최하는 공모전은 기술력이 좋은 핀테크 스타트업을 지원해 사업화 기회를 제공하겠다는 취지의 프로그램이었기 때문이다. 창업 6년차에 접어든 A사 대표는 핀테크 스타트업의 기회까지 뺏고 싶지는 않았다고 했다.
정부가 핀테크 활성화로 창조경제를 지원하겠다고 선언한 지 1년이 지났다. 정부는 “핀테크 활성화가 금융 산업에 경쟁과 혁신을 통한 ‘메기효과’를 발생시킬 것”이라고 장담했지만, 아직은 ‘찻잔 속 태풍’에 그치고 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정부도 조바심을 내고 있다. 정부의 핀테크 활성화 정책이 금융사의 팔을 비틀어 실적을 강요하는 형태로 변질되고 있다는 지적이 업계에서 나온다. 금융사들은 비슷한 수준의 핀테크 지원책을 우후죽순으로 쏟아내고 있고, 기껏 지원해놓고 실제로는 활용하지 않는 일이 계속되고 있다.
◆ 핀테크 활성화 외치던 금융당국, 사실상 금융사 팔 비틀기로 전환
지난해 9월 금융위원회는 경기도 고양시 KB연수원에서 ‘1박2일 합동 핀테크 워크숍’을 열었다. 핀테크 업체들과 금융사들의 협력 방안을 논의하는 자리였다. 워크숍에는 윤종규 KB금융지주 회장, 조용병 신한은행장, 함영주 KEB하나은행장, 이광구 우리은행장, 권선주 IBK기업은행장, 김주하 NH농협은행장, 위성호 신한카드 사장, 원기찬 삼성카드 사장, 김덕수 KB국민카드 사장 등 금융사 최고경영자(CEO)들이 대거 참석했다.
이날 워크숍은 사실상 금융위가 금융사들에게 핀테크 지원 확대에 대한 약속을 받는 자리였다. 금융사 CEO들은 임종룡 금융위원장과 핀테크 관계자들 앞에서 차례로 핀테크 지원 계획을 직접 브리핑했다. 임종룡 금융위원장은 CEO들에게 “올해 안에 가시적이고 확실한 핀테크 성공 사례가 나와야 한다”고 강조했다. 워크숍에 참석한 금융당국 고위 관계자는 “CEO들이 금융위원장 앞에서 직접 브리핑했으니 앞으로 핀테크를 어떻게 지원할지 고민이 많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 시중은행 임원도 “임 위원장이 지난해 3월 취임한 이후 금융사 CEO를 단체로 호출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며 “국민들이 체감할 만한 핀테크 킬러 서비스(Killer Service)가 나오지 않으니 금융사를 압박하고 나선 것”이라고 말했다.
금융당국의 압박은 핀테크 업계에 약이 아닌 독이 되고 있다. 금융사의 핀테크 지원이 정부 보조를 맞추기 위한 ‘보여주기 식’으로 진행되다 보니 단기 성과 위주의 지원책이 쏟아지고 있다.
◆아이디어 들고갔더니 문전박대… “단기간내 성과 나오지 않으면 지원 못한다”
대표적인 것이 금융사의 핀테크 지원 센터다. 지난해 금융사들은 핀테크 지원을 위한 센터를 잇달아 열었다. KB금융지주 ‘KB핀테크허브센터’, 신한금융지주 ‘퓨처스랩’, 기업은행 ‘IBK핀테크드림지원센터’, NH농협은행 ‘NH핀테크협력센터’ 등이다. 이들 센터의 목적은 핀테크 발굴·육성이다. 금융사들은 모두 자사의 센터가 ‘핀테크 육성의 요람’이라고 홍보했다.
그러나 현재 각 센터마다 3~4개 핀테크 업체만이 지원받고 있다. 아예 지원할 핀테크 업체를 선정하지 못한 곳도 있다. 금융사들은 사업성을 갖춘 핀테크 업체가 드물다고 하소연한다. 지원을 하고 싶어도 마땅한 업체가 없다는 것이다.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센터를 방문하는 핀테크 업체들 상당수가 초기 아이디어 수준의 아이템으로 상담한다”며 “이 중 사업화가 가능한 기술은 거의 없다고 보면 된다”고 말했다.
핀테크 업계의 주장은 달랐다. 업계는 금융사들이 성장 가능성보다 단기에 성과를 낼 수 있는 업체들 위주로 지원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일부 금융사는 초기 핀테크 업체를 지원하는 ‘엑셀러레이터 프로그램’을 아예 운영하지 않고 있다. 기술력이 검증된 핀테크 업체만 지원하겠다는 의도다.
한 핀테크 업체 관계자는 “금융사들이 초기 핀테크 업체를 지원한다면서도 막상 센터에 사업계획서를 들고 찾아가면 상담만 하고 돌려보내는 경우가 많다”며 “최근 인기가 많은 블록체인이나 외화송금 분야의 핀테크 업체에만 지원이 집중되고 나머지 업체는 자금난에 허덕이는게 업계 실정”이라고 말했다.
◆ 금융사 핀테크 기술 채택 드물어… 당국·금융사 혼선 여전
더 큰 문제는 금융사들이 핀테크 업체를 지원하면서도 실제 이 기술을 자사의 서비스에 도입하는 경우가 드물다는 점이다. 최근 금융권에서 가장 활발하게 도입되는 기술은 생체인식이다. 지문과 정맥, 홍채 등을 통해 비대면으로 고객의 본인확인을 하는 기술이다. 국민, 신한, 하나, 기업은행 등이 생체인식 기술을 도입했거나 도입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은행들이 생체인식 기술을 도입한 것은 금융당국이 금융사의 비대면 본인확인 의무화를 추진하고 있어서다. 은행들은 올해부터 고객이 영업점을 방문하지 않고 계좌개설이나 상품 가입 등을 할 수 있도록 서비스를 도입해야 한다.
은행들은 신분증 사본 제시와 영상통화, 현금카드 등 전달 시 확인, 기존계좌 활용 방식 중 2가지 방식을 의무적으로 채택해 비대면 본인확인을 할 수 있다. 여기에 추가로 생체인식을 통한 본인인증 기술을 도입하고 있다.
생체인식을 도입한 것도 결국 당국의 제도 변화에 따른 것이다. 이외에 금융사들이 자발적으로 도입한 핀테크 기술은 거의 없다. 금융당국의 압박에 ‘울며 겨자먹기’로 핀테크 지원에 나서다 보니 발생하는 부작용이다. 핀테크 기술을 도입했다 사고가 발생할 것을 우려하는 금융권의 ‘보신주의’도 한몫했다. 핀테크 업계에서는 “호랑이(정부)를 피하니 사자(금융사)를 만나는 것이 우리나라 핀테크 현 주소”라는 우스갯소리가 나올 정도다.
핀테크 업계와 전문가들은 금융사들이 중장기적 안목으로 핀테크 업체를 지원하고 금융당국도 단기 성과보다는 핀테크 생태계를 조성하는데 주력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박수용 글로벌핀테크연구원 원장은 “금융회사들이 핀테크 업체를 지원하고 이들의 신기술을 채택하는 선순환 구조가 조성돼야 한다”며 “이렇게 핀테크 업체들의 실적이 쌓여야 글로벌 핀테크 기업도 나올 수 있다”고 말했다.
출처 : 조선닷컴 송기영기자
http://biz.chosun.com/site/data/html_dir/2016/01/02/2016010201001.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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