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검이 찾아낸 1천여개 계좌서 전액 출금
금융위, '조 단위' 과징금·세금 회피 길터줘
[한겨레] “특검에서 조세포탈 문제가 된 차명계좌는 과거 경영권 보호를 위해 명의신탁한 것으로 이번에 이건희 회장 실명으로 전환하게 됩니다. 이에 대해 이 회장은 누락된 세금 등을 모두 납부한 후 남는 돈을 회장이나 가족을 위해 쓰지는 않겠다고 하면서 유익한 일에 쓸 수 있는 방도를 찾아보자고 하였습니다.”
2008년 4월22일 삼성그룹이 발표한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의 대국민 사과문 및 경영쇄신안에 포함된 내용이다. 하지만 삼성과 이 회장이 약속한 차명계좌의 실명전환과 누락된 세금 납부 약속은 이뤄지지 않았다. 특히 이 과정에서 최대 수조원이 국고에 환수되지 않고, 이 회장에게 건네진 것으로 나타났다.
15일 금융감독원이 국회 정무위원회 소속 박용진 의원(더불어민주당)에게 제출한 ‘2008년 조준웅 특검 시 확인된 은행별 차명계좌 및 실명전환 현황’ 자료를 보면, 64개 은행계좌 가운데 1개만 실명전환됐고 957개 증권계좌에선 실명전환 실적이 전무한 것으로 확인됐다. 금감원 일반은행국 강선남 검사기획팀장은 “은행계좌 가운데 실명전환된 1개는 차명계좌주(임직원) 명의로 바뀐 것이고, 이건희 회장 소유 계좌는 실명전환하지 않고 모두 해지한 뒤 찾아갔다”고 밝혔다. 증권계좌 957개는 모두 전액 출금(이체)됐고 646개는 계좌가 폐쇄됐다. 나머지 311개는 유지되고는 있지만 잔고가 없거나 나중에 입금된 고객예탁금 이용료 등 소액이 남아 있는 상태라고 금감원은 설명했다.
앞서 2008년 특검은 삼성 전·현직 임원 486명 명의로 된 주식(4조1009억원)과 예금(2930억원) 등 총 4조5천억원 규모의 1천여개 차명계좌를 찾아내고, 이를 이 회장이 선대 회장으로부터 상속받은 것으로 인정해줬다. 이번 금감원 자료에는 이 가운데 주식과 예금 약 4조4천억원을 이 회장이 찾아간 것으로 나와 있다.
삼성은 특검 수사 뒤인 2008년 말 기존 차명계좌에 있던 4조원 규모의 삼성전자·삼성생명 등 주식을 이 회장 앞으로 실명전환했다고 밝힌 바 있다. 하지만 이는 차명계좌를 해지한 뒤 이 회장 명의 계좌에 입금시킨 명의변경으로, 금융실명제법에 따라 과징금과 세금 납부를 해야 하는 의무가 생기는 실명전환과는 다르다. ‘금융실명거래 및 비밀보장에 관한 긴급재정명령’(긴급명령)이 시행된 1993년 8월12일부터 ‘실명전환 의무기간’(같은 해 10월12일까지)이 지난 뒤 실명전환을 할 경우엔 그간 이자·배당수익의 최고 99%를 소득세·주민세로 원천징수하고, 긴급명령일 당시 자산 가액의 50%(의무기간 5년 이상 경과)를 과징금으로 부과하도록 돼 있다. 결국 실명전환할 경우 이 회장은 많게는 조 단위로 추정되는 과징금과 세금을 정부에 납부해야 했지만, 이 회장은 명의변경을 통해 온전히 차명 재산 전액을 찾아갔다.
박용진 의원은 “금융당국이 차명계좌는 금융실명제법상 실명전환 의무가 있는 비실명자산이 아니라고 유권해석을 내려줘, 이 회장이 차명 재산을 세금 한 푼 안 내고 찾아갈 수 있었다. 지금이라도 누락된 세금과 과징금을 징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순혁 기자 hyu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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